따뜻한 밥

핑크 가디건과 빨강 장화

snoow 2019. 9. 21. 21:41

2019. 9. 21.
태풍이 불기 전에 광양에 다녀오기로 했다.
셋째가 두고 간 조카의 바지와 둘째가 건넨 옷들과 모자를 들고 말이다.
둘째가 말한 물건을 챙기러 홈타운에 들렀더니 넷째가 퇴근해서 쉴 참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넷째는 비상식량창고에서 소시지와 핫도그를 건네주었다.
전날 먹은 아구찜의 고추가루 탓인지 속이 불편해서 많이 먹지는 못했지만 뭔가를 건네주는 넷째가 고마웠다.

버스를 놓칠까봐 빨리 나서서인지 정류장에 도착하니 여유가 있었다.
따뜻한 커피가 한 잔 마시고 싶어 예전에 동래와 미남 사이에 있던 스타벅스를 떠올리고는 걸어가보았다.
커피를 자주 마시지는 않지만 오랜만에 먹으니 카페라떼가 고소하고 맛났다.
비가 오는 싸늘한 날씨라 따뜻한 커피가 제법 잘 어울렸다.

광양에 도착하니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비가 와서 반바지에 긴팔티셔츠 차림으로 나섰는데 바람과 비 때문에 추웠다.
셋째에게 옷을 건네고는 전에 내가 준 옷들 중에 핑크색 가디건을 다시 돌려받아 입기로 했다.
조금은 두툼한 편이라 계절을 앞서가는 차림이었지만 추위에 떠는것보다 따뜻한 것이 더 중요했다.

점심은 용우동에서 김치알밥을 주문했다.
빨간 음식을 먹고 속이 안 좋았으면서 빨간 음식을 또 시키고야 말았다.
가끔은 내 몸상태를 무시하는 결정을 무심결에 할 때가 많다.
내가 시킨 김치알밥을 다 먹고 셋째가 선택한 불고기덮밥까지 더 먹고는 수저를 놓았다.
불편한 속을 위해 셋째에게서 매실엑기스를 얻어왔다.
따뜻한 물에 넣어 먹으니 속이 따뜻해져 온다.

둘째가 장화를 가져왔다기에 다시 홈타운에 들렀다.
마침 태풍도 분다고 하니 장화가 필요할 것 같아 달려간 것이다.
아쉬운 것은 장화 문수가 짝짝이라 불편한 것이었다.
그래도 분홍색운동화 대신 빨강장화를 신고 빗길을 걸으니 물 샐 염려가 없어 편했다.
비 오는 날, 둘째와 함께 케이닥에 들러 양념간장반반 치킨을 먹으며 막내에 대한 서운함들을 이야기했다.
막내도 말 많고 탈 많은 누나들 틈에서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부모님 곁에서 묵묵히 지내던 막내가 장가를 가니 서운한 마음들이 많다.
엄마도 내가 결혼을 하면 그런 서운한 마음들이 들 수도 있겠다.

부산으로 올라오는 길에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나서 정체가 되었다.
차를 타는 이상 교통사고에서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네이버를 검색하다가 <유미의 세포들>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웅이가 유미에게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장면이나 바비가 교통사고의 아찔한 순간에 유미를 떠올리는 것을 보면서 나도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그를 떠올리는데 가슴이 찡한 순간이 있었다.
해산을 하고 나서 그가 나를 바라보는 얼굴을 상상하는 순간이었는데 설레임이 밀려왔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