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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밥

기적의 자각

by snoow 2018. 5. 8.


2018. 5. 8.


며칠째 날이 계속 흐리다.

해가 반짝이는 날을 더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렇게 흐린 날이 계속되면 우울해진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겨우 출근했는데 약속했던 아이들이 오지 않아 허탕을 치고 말았다.

물론 몇 명은 평소와 달리 닫힌 문을 보면서 돌아가기도 했다고 한다.

나의 귀한 시간이 날아가는 느낌이라 조금 속상하기는 했지만 '운동삼아'라고 위로해본다.


오늘은 망양로를 따라 여행을 했다.

190번 버스를 타고 산복도로를 관통해서 화신아파트와 금수사 사이에 있는 초량845에 들렀다.

마침 점심 시간이라 정식을 시켜 먹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식재료와 소스의 응용이 돋보이는 요리들이 많아 신선했다.

깻잎순샐러드라던가 고추장이 들어간듯한 소스가 이채로웠다.

커다란 창문으로 부산대교가 보이는 풍경도 좋았다.

든든히 점심을 먹고는 갈맷길을 따라 걸었다.

흐리고 바람이 많이 불어 티셔츠와 가벼운 봄잠바 사이로 바람이 들이쳐서 춥기만 했다.

유치환우체통에 도착하니 유치환의 '행복'이라는 시가 그에게 편지를 쓰라고 종용하는듯 했다.

진지하게 그에게 편지를 쓰고 우체통에 들러 편지를 보내볼까 하고 생각했다.

한참을 더 걷다가 86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기로 했다.

오랜만에 고래커피에 들러 카페라떼를 한 잔 마셨다.

즉석에서 계획한 망양로 탐방길이 나쁘지는 않았다.


스캇 펙의 『아직도 가야할 길』을 읽으며 일상의 기적과 같은 일에 대해 자각하는 것이 자아실현이라는 정의가 눈에 띄었다.

사소하고 작은 일조차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적'의 범주에 들 수 있다는 것이다.

86번을 타고 수정동을 지나갈 때 눈앞에 펼쳐지는 수많은 집들을 보면서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이 따스했다.

아직은 세입자의 입장이지만 말이다.

어젯밤부터 조금만 빚을 지면 살 수 있을 것 같은 빌라들을 살펴보았다.

지금 내 생활을 보면 잠을 잘 수 있는 방과 손님들이 잠시 앉아서 쉬어갈 수 있는 거실 정도만 있는 집이면 족하다.

그와 함께 산다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큰 집이면 좋겠다.

아니면 각자의 집에서 살면서 서로 왕래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아니 이정도여도 그와 함께라면 너무 좋을 것 같다.

넓은 집도 커다란 성공도 그와는 바꿀 수 없을 것 같다.


저녁은 표고버섯, 애호박, 양파, 감자, 사과가 들어간 카레를 해먹었다.

카레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유일하게 편하게 할 수 있는 메뉴인 것 같다.

밥, 카레, 계란후라이, 오뎅볶음, 오이무침... 저녁은 그렇게 먹었다.

그와 나란히 앉아서 저녁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이 올까?

그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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